영국 매체들이 최근 미국과 협력이 끊기더라도 핵 억지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다는 보도를 쏟아내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영국의 핵 억지력과 긴밀한 미국과 관계가 끊기면 수백억 파운드(수십조 원)가 들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경고와 함께 사전 대비에 나서야 한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2024년 영국 핵추진 잠수함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트라이던트 2 시험 발사 실패 이후 미국과 영국이 의견 충돌을 빚었던 사례를 들어 미국과 얽힌 영국의 독자적 핵 억지력 강화 필요성을 짚었다.
2024년 1월 미국 플로리다주 해상에서 영국 뱅가드급 핵잠수함이 발사한 미사일이 수천㎞ 이상을 날아 대서양에 도달해야 했으나 발사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떨어졌다. 이후 미·영 당국자들은 발사 실패 정보를 얼마나 공개할 지를 두고 격렬하게 논쟁하며 갈등이 유발했다고 전하면 미국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자적 핵무장 추진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뱅가드급 잠수함은 영국 해군이 보유한 4척의 전략 핵탄도 미사일 잠수함(SSBN)이다. 2010년 현재 영국에서 유일한 핵미사일을 장착한 원자력 잠수함이다. 지상·공중 배치 핵무기를 모두 퇴역시킨 영국의 유일한 핵 억지력이다.
영국, 미 없는 핵 억지력에 의구심 제기
문제는 미사일 발사 실패로 초래된 영국과 미국의 갈등 속에서 영국 측은 연간 30억 파운드(5조 6350억 원) 운영 비용이 드는 핵 억지력과 관련한 국민 신뢰를 줄 수 있는 독자적 안보 채비의 필요성 차원에서 사고의 원인 등 투명한 공개가 주장이 일각에서 나왔지만, 미국은 이에 반대했고 결국 미국의 뜻이 관철돼 ‘이상 현상 발생’ 정도로만 발표하는데 그쳤다.
보도에 따르면 뱅가드급 1척은 최대 16기의 트라이던트 미사일을 실을 수 있고, 미사일 1기에는 각각 탄두 8개가 장착될 수 있다. 영국은 뱅가드급 잠수함 4척을 보유하고 있으며 작전 통제권을 전적으로 가진다. 그러나 미국 록히드 마틴이 설계한 이 미사일은 미·영이 공동 관리한다. 영국 해군이 독자로 맡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이 들어간다는 이 때문에 영국이 독자적 핵무장이 아닌 미국과 손 잡은 이유다.
이 사고 이후 영국이 구매한 트라이던트 미사일 비축 분은 미국 조지아주 킹스베이에 있다. 배치됐던 미사일도 정기 유지관리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더욱 우려스러운 부문은 영국은 노후 뱅가드급 잠수함을 대체하려고 건조 중인 드레드노트급 잠수함에 대해서도 미국과 공동으로 미사일 격실을 설계해 비용을 절감하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새로운 핵탄두 W93도 공동 작업하고 있다.
영국이 보유한 핵탄두 자체도 미국이나 러시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은데, 그나마 보유한 탄두의 실전 배치도 미국의 협력 없이는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군사전문가 니컬러스 드러먼드는 인터뷰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트라이던트 미사일의 영국 사용을 막을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부품과 기술 지원을 의존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라지면 핵 억지력이 약화할 것”이라며 “미·영 관계가 갈라져 그들이 트라이던트 미사일을 주지 않는다면 드레드노트급에 수십억 파운드를 쏟아붓는 게 소용없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2025년 1월 기준 핵탄두는 미국이 5044개(배치 1770개, 비축 1938개, 퇴역 1336개), 러시아는 5580개(배치 1710개, 비축 2670개, 퇴역 1200개), 프랑스는 290개(배치 280개, 비축 10개), 영국은 225개(배치 120개, 비축 105개)로 알려졌다.
유럽연합(EU)와 달리 미국과 각별한 관계라는 영국조차 핵무장 등 독자적 안보 구축의 필요성이 커지면서도,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전통적인 대서양 동맹을 무시하는 듯한 행보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집단 방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만큼 유럽도 미국 없는 독자적 안보가 구축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현실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습이다.
당장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끊는 것을 본 상당수 유럽 국가 정부가 이미 구매한 미국산 무기를 계속 작동시키는 데 문제가 생기지 않을지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한 뒤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 저지에 쓰던 블랙호크 헬기 등 군용기는 그대로 남았지만 미군 협력업체와 부품,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는 사라졌다. 단 몇 주 만에 이런 군용기 절반 이상이 발이 묶이는 사태가 발생했다.
전투기 조종사 출신 스웨덴 AI 방산업체 아비오니크 최고경영자(CEO) 미카엘 그레브는 “트럼프가 젤렌스키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면 그들(유럽)은 걱정해야 한다”며 “북유럽과 발트해 국가들은 우리한테도 똑같이 할까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유럽은 미국 없는 독자적 안보 구축이 가능할까.
일각에서는 재래식 전력에 있어서는 유럽이 러시아에 뒤지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군사 전략가들을 인용해 러시아와의 싸움은 치명적이고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며 핵전쟁의 위험성을 높이지만, 재래식 전투에서는 러시아가 유럽을 상대로 고전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령관을 지낸 필립 브리드러브는 “우리가 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군대가 압도적인 수준은 아니다”며 “그들은 우크라이나 전투에서 매우 고전했다”고 지적했다.
EU 공중정보 능력 사실상 美 ‘저당’ 잡혀
물론 유럽은 정보·감시 및 정찰과 지휘통제 면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방공 능력도 부족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은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상당한 방어 능력을 갖춘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영국 국제전략연구소(IISS)에 따르면 나토의 유럽 군대는 약 5000 대의 전차와 2800문 이상의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다. 아울러 약 2000 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고 2030년까지 최첨단 F-35 전투기 500대 이상을 보유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러시아는 최대 3000 대의 전차와 유럽의 절반 분량의 자주포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투기와 폭격기·지상 공격기는 약 1000대로, 실전에 투입한 전투기의 약 20%는 손실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IISS는 분석했다. 다만 유럽 국가들 역시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느라 무기 비축량이 감소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미국이 항공기·무기 체계를 무력화할 ‘킬 스위치’(kill switches)를 은밀히 보유하고 의구심이다. 전투기나 방공 미사일, 드론, 조기경보기 등 첨단 무기와 군 장비가 예비 부품과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저스틴 브롱크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 선임연구원은 “킬 스위치 같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라며 “대부분 유럽 군은 미국에 통신 지원, 전자전 지원, 심각한 분쟁 시 탄약 재공급에 의존한다”고 꼬집었다.
이에 덴마크는 트럼프 대통령이 눈독을 들인 그린란드 방위 강화를 위해 미국산 F-35를 수용할 수 있도록 활주로를 확장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미군 눈치는 보고 있는 실정이다.
게닥 전후 방위 투자를 소홀히 한 데 따른 병력과 탄약 등 무기 부족도 계속 지적된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부 장관은 최근 유럽 국방장관들에게 미국이 유럽에서 병력 일부를 철수하겠다는 계획을 언급해 유럽이 긴장하고 있다.
유럽 각지의 육·해·공군 기지에 주둔하는 미군은 약 9만 명이다. 특히 미국이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조 바이든 행정부가 폴란드, 루마니아 등 동유럽으로 보낸 미군 2만명을 뺀다면 유럽 안보에는 당장 비상이 걸리게 된다.
미국에 대한 유럽의 의존도 높아 당장은 독자적 안보 구축은 힘들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미국산 무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도 발목을 잡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로 꼽힌다. 그럼에도 유럽이 독자적 안보 체제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 과정에서 노골적인 친러 행보를 보이자 유럽 주요국 정상들은 ‘자강(自强)’ 의지를 다지며 대규모 국방비 증액과 공동 방위 협력을 선언하며 분주하게 나서고 있는 분위기다.
가장 먼저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2.3% 수준인 국방비 지출 규모를 2027년 2.5%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른 추가 지출은 연간 134억 파운드(약 24조 원)로 추산된다. 영국 정부는 향후 이 비율을 3%까지 끌어올리겠다며 이는 자국의 군사력 강화뿐 아니라 유럽 내 안보 자립을 위한 핵심 조치라고 강조했다.
독일도 강한 유럽을 위해 방위비 지출을 늘리기로 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총선에서 제1당이 된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은 집권 사회민주당(SPD)과 함께 2000억 유로(약 301조 원) 규모의 긴급 방위비 편성을 논의 중이다. 기존 1000억 유로 규모의 특별 방위 예산은 2027년 소진되는 만큼 새 의회 출범 전 예산 확보가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추가되는 긴급 방위비는 독일군 현대화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자금으로 쓰일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 활성화에 더해 방위비 지출 증가라는 과제를 안은 독일은 GDP의 0.35% 이상 신규 부채 발행을 금지하는 재정준칙(부채 브레이크) 완화도 추진한다.
英 “GDP 3%까지 국방비 늘리겠다”
스페인도 유럽연합(EU)이 미국을 따라가지 말고 독자적인 대(對)중국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호세 마누엘 알바레스 스페인 외무장관은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은 중국이 언제 파트너가 될 수 있고 언제 경쟁자가 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며 “당연한 동맹이라고 생각하는 미국과 대화를 할 수는 있지만 유럽은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전통적인 동맹관에서 벗어난 미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만큼 안보 독립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일찍이 유럽 내 공동 방위 체제를 갖출 것을 주장해온 프랑스는 유럽의 자강력 확보와 함께 미국의 개입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미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을 위해 유럽 국가의 평화유지군 배치가 필요하다면서도 “확실한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대응하려면 유럽의 단독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다.
한발 더 나아가 유럽 각국에서 자강론이 분출하자 EU도 자체 방위 역량 강화를 위해 머리를 맞대기로 했다. 3월 6일 특별정상회의를 열고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과 방위비 조달 방안을 논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EU 집행위원회는 향후 10년간 5000억 유로(약 750조 원)의 방위 투자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EU 정상들이 기존 기금을 군사적 목적으로 전환하거나 각국이 자국 예산을 보다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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