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는 38만여 쪽에 달하는 1994년 외교문서를 공개한다고 27일 밝혔다. 이번에 공개되는 문서는 총 2506권 분량이다. 외교문서 공개제도는 생산·접수 후 30년이 경과한 외교문서를 일련의 심의 절차를 거쳐 일반에 공개하는 제도다. 개인정보·상대국이 비공개 처리한 경우·현재 진행중인 사안인 경우 등은 비공개가 유지되기도 하며, 비공개로 분류된 외교문서는 5년마다 재심의를 거쳐 공개 여부를 다시 결정하게 된다.
이번 공개된 방대한 외교문서 중 특히 이목을 끄는 부분은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의 사망이다. 김일성은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북한은 34시간 후인 9일 정오에 이 사실을 발표했다. 김일성 사망 소식에 고(故)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전군 비상경계 태세를 지시하고, 당일 오후 2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했다. 한반도 안전과 평화를 강조하면서, 특히 '한반도 위기감을 조성하는 외신 논조를 방지하고 한국의 평화지향적인 모습을 부각'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당시 일각에서는 이와 관련해 내부 권력투쟁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 등을 제기하기도 했다. 다만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는 관련 내용이 담기지 않았다. 북한은 당시 의혹 제기를 우려한 듯, 주석 서거 사실을 발표하면서 "18일 진행된 병리해부검사에서 급성 심근경색 등의 진단이 확정됐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에 공개된 당시 외교문서에 따르면 주루마니아대사관도 “김일성의 사망은 최근 남북정상회담 준비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파악해 보고했다.
외무부(현 외교부)도 차관을 중심으로 비상대책반을 가동하고 각종 정보 수집에 나섰다. 관건은 후계구도였다. 북한은 김일성 사망 소식과 함께 김정일의 계승을 함께 보도했으나, 안정적인 정권 이양이 가능할지는 당시로서는 미지수였다. 다만 주러시아대사관은 "김정일이 이미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북한의 권력 향배나 대내외 정책 방향의 변화를 예측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보고를 전해왔다. 일본도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할 경우 당분간 현 체제가 유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어 9월에는 중국에서 "김정일의 순탄한 권력 승계가 거의 확실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김일성의 존재는 북한에서 워낙 절대적이었다. 주량 중국 전인대 외사위원장은 "북한 친구들에게 문의해보니 북한 주민들이 아직도 비통해하고 있으며, 김정일의 권력승계와 관련한 경축 활동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두 번째 관건은 당시 북한과 논의가 오가고 있던 미북고위급회담, 남북정상회담이다. 김일성 사망 직전, 로버트 칼루치 미국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북한 외무부 부부장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3단계 미북고위급회담의 1차회의를 갓 연 상태였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이 북한에 어떤 정치적 격동을 몰고올지 예상이 어려운 상황에서 양측의 고위급회담도 잠정 보류됐다.
같은 시기, 남북은 7월 25~27일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이미 합의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미북정상회담을 위한 협의는 재개돼 같은 해 10월 제네바 합의로 이어졌으나, 남북정상회담은 결국 무산됐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서는 이밖에 무라야마 담화, 재사할린 한국인 영구귀국 문제 등을 둘러싼 당시의 상황이 담겨 있다. 1994년 외교문서는 28일부터 열람 가능하다. 오프라인 열람을 희망하는 경우 외교사료관 홈페이지를 통해 미리 예약한 후 서울 양재동 외교사료관 열람실을 방문해 마이크로필름, DVD에 담긴 문서를 확인할 수 있다. 온라인 열람은 공개 외교문서 열람청구시스템을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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