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증원 법안이 국회에서 속도를 내자, 법조계와 대법원 내부에서는 “인력 확대보다 사법구조 개편이 우선”이라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도 “공론의 장이 마련돼야 한다”며 신중한 접근을 주문한 가운데, 일각에선 이번 논의가 오히려 사법부의 근본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7일 법조계에 따르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 4일 소위원회를 열고 대법관 정원을 단계적으로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해당 개정안은 현재 14명인 대법관 수를 매년 4명씩 증원해 4년간 총 30명까지 확대하는 내용으로, 법률 공포 후 1년 뒤부터 시행되도록 부칙을 붙였다. 다만 민주당은 법사위 전체회의를 소집해 법안을 일괄 처리할 예정이었지만 본회의 상정은 보류하기로 했다. 이 대통령이 취임 일성으로 ‘통합’을 언급한 만큼, 사법부에 대한 입법 압박의 속도와 강도를 조절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조 대법원장 역시 증원 필요성엔 공감하면서도 신중한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5일 오전 출근길 기자들과 만난 조 대법원장은 “헌법과 법률이 예정한 대법원의 고유 기능이 무엇인지 되짚을 필요가 있다”며 “국회와 계속 협의하면서 국민을 위한 바람직한 개편 방향을 설명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법조계에서는 현재 3심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단순히 대법관 수만 늘릴 경우, 오히려 사법체계 전반에 혼란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구조”라며 “지금처럼 대부분의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구조에서 인원만 늘린다고 해결되진 않는다”고 지적했다.
핵심 대안으로는 ‘상고허가제’가 꾸준히 거론된다. 이는 대법원이 법률적 쟁점이 있는 사건만 선별해 심리하고, 사실관계 다툼이나 판례가 확립된 사건은 본안 심리 없이 기각하는 제도다. 독일, 일본 등 주요국에서 이미 자리 잡은 제도로, 대법원의 법률심 기능 강화를 위한 대표적 제도다.
하지만 이 제도의 도입은 헌법 개정을 전제로 한다.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이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어, 상고심 제한은 위헌 논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과거에도 상고허가제 논의가 있었지만, ‘재판받을 권리’ 침해라는 여론에 부딪혀 무산된 바 있다”며 “국민적 설득 없이는 어렵다”고 말했다.
대법관 정원이 확대되면 전원합의체 운영 방식의 전면 재설계도 불가피하다. 현재는 대법원장을 포함해 13명 중 9명이 출석해야 회의가 성립되는데, 30명 체제에서는 이 같은 방식의 유지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 부장판사는 “전합에 30명이 모두 참여하면 효율성은커녕 핵심 쟁점 정리도 어려워진다”며 “결국 선임 재판관 중심의 소부 전환이나 전합 기능의 분산이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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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인력 확대 역시 구조적 딜레마를 안고 있다. 재판연구관이나 연구원을 하급심 판사로부터 충원하게 되면, 1·2심 법원의 인력 공백과 재판 지연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경력 판사들이 대법원 연구관으로 전출되면 남은 재판부의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며 “사법 체계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상고심 중심의 구조가 고착될 경우, 1·2심 법원은 단순한 절차 통과 창구로 전락하고 대법원만이 실질적인 판단기관이 되는 ‘비대칭 구조’가 고착될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 한 현직 부장판사는 “국민은 대부분 1·2심에서 재판을 마주하는데, 그 법원이 약화되면 사법 신뢰는 더 멀어진다”고 말했다.
대법원 내부에서는 이번 논의가 오히려 사법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는 회의적 시선도 감지된다. 한 대법원 관계자는 “법관 증원은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더 나은 재판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청사진이어야 한다”며 “그런데 오히려 재판 지연과 내부 혼란을 초래한다면 추진 자체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이번 증원 논의가 장기적으로 ‘정책법원’과 ‘상고법원’의 이원화 구조로 나아가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대법원이 단순 사건 처리기관을 넘어 헌법적 가치와 사회 기준을 형성하는 정책적 사법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일반 상고 사건은 별도 상고법원에서 전담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비법조인 출신을 일부 대법관으로 선임하는 방안도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대개편이 현실화되려면 헌법 개정과 법원조직법 개편, 심급 구조 재설계 등 사법 시스템 전반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당분간은 구조 개편 없이 증원만 앞세운 법안 처리에 대한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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