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해 있는 경영 리스크가 당분간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량을 늘리며 자금을 확보하고 있다. 이달 회사채 순발행액(발행액에서 상환액을 뺀 금액)은 약 1조 6000억 원인데 4월 회사채 순발행액이 1조 원을 넘긴 것은 코로나19로 경영 리스크가 증가하고 저금리에 유동성이 넘쳤던 2021년 이후 4년 만이다. 일부 기업은 민평금리(민간 채권 평가사들이 책정한 기업의 고유 금리)를 크게 웃도는 고금리로 채권을 ‘오버 발행’하며 빚으로 빚을 갚고 있어 중장기적 재무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8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이달 1~17일 회사채 순발행액은 1조 6477억 원으로 2021년 4월 이후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 회사채 순발행액은 2022년 1295억 원, 2023년 7285억 원을 기록한 후 2024년에는 -3조 9156억 원으로 채권 발행량보다 상환량이 많았다. 월말 발행 예정 물량이 만기 물량보다 많아 이달 순발행액은 2조 원을 웃돌 것으로 전망된다. 올 1분기 회사채 순발행액의 경우 지난해 14조 6158억 원에서 올해 16조 2165억 원으로 증가하며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다수 기업은 회사채를 늘려 단기 부채를 갚고 있다. CJ제일제당은 16일 발행한 6000억 원 규모의 회사채 조달 자금 전액을 기존 채무 상환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CJ제일제당이 차환하려 하는 채무는 모두 만기가 1주일~3개월인 단기 기업어음(CP)이다. 신규 발행 회사채 금리는 기존 채권 금리보다 낮아 부채를 조정하는 의미가 있지만 전반적인 부채 규모가 줄지 않고 있다는 점은 문제다.
이 외에도 SK이노베이션은 22일 수요예측을 거쳐 이달 말 4000억 원 이상의 회사채를 발행할 예정인데 발행액 전부를 사채 및 기업어음 차환 용도로 쓸 계획이다.
일부 기업은 시장이 평가한 민평금리보다 높은 금리를 내면서까지 발행량을 늘리고 있다. 1000억~2000억 원의 회사채 조달을 계획했던 포스코이앤씨는 수요예측 흥행으로 16일 2000억 원 증액 발행에 성공했는데 민평금리 대비 25~30bp(1bp=0.01%포인트) 높은 수준의 이자율을 채권자들에게 제공하기로 했다. 조달 자금 전액은 자재·설비 등 협력 업체 대금을 지급하는 데 사용한다. 금리를 높게 줘가면서까지 채권 발행량을 늘리고 협력 대금을 지급할 정도로 자금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이다.
금융투자 업계 관계자는 “일부 기업은 이자보상배율(영업이익을 이자비용으로 나눈 값)이 1 미만인데도 오버 발행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라며 “영업 활동을 하며 내는 수익으로 이자를 갚기 어려운 상황에서 고금리채 발행을 늘리면 결국 중장기 재무 리스크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의 주요 자금 조달 창구인 은행들은 최근 대출을 조이고 있다. 원·달러 환율 급등세에 은행권의 자본비율 관리가 어려워진 탓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은행권 기업대출 잔액은 전달보다 2조 1000억 원 감소한 1324조 3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3월 기준 기업대출 잔액이 줄어든 것은 20년 만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주력 산업 전망이 하나같이 안 좋아 내부 대출심사 기준을 높여뒀다”면서 “몇몇 대기업에 대해서는 신규 대출을 내주지 않기로 방향을 잡았다”고 말했다.
이에 기업들은 만기가 1년 이내로 짧고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은 단기차입금 의존도를 높이는 실정에 이르렀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국내 상장사의 단기차입금은 369조 4315억 원으로 2023년(317조 4381억 원) 대비 약 52조 원 늘었다. 이러한 흐름은 올해 들어서도 더 강해지면서 기업들의 부채 관리에도 비상등이 들어왔다.
은행 대출 길이 좁아진 기업들이 단기 CP 시장을 두드리고 이를 갚기 위해 다시 회사채 시장을 찾는 상황이 지속되면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있었던 기업부채 문제가 우리 경제의 새로운 리스크로 떠오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비·수출 등이 급감하면서 1%대 성장마저 위태로워지며 한국이 위기에 빠졌다”면서 “그동안에는 가계부채가 문제됐지만 장기 성장 동력이 꺼져가고 있는 가운데 기업부채가 한국 경제의 새로운 뇌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산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각 기업들은 전사 차원에서 허리띠를 졸라매는 비상 경영에 돌입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